창업이라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결과로만 평가받게 되는 것 같아요. 저희 벤처캐피탈(VC)업 자체도 지표나 결과물로 그 팀이 성공했냐, 실패했냐를 따지는 업종이긴 하지만,제가 만약 창업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만큼의 크기와 기울기만큼 성장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요.
interview ㅣ 박인엽 패스트벤처스 심사역
Editor ㅣ 김경영
스타트업은 홀로 힘들고, 외로운 창업가의 길이라고 하죠. 창업 10명 중 9명은 망한다는 말도 나옵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은 수면 아래서 열심히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창업에 관심이 많아 미국에서 남성 화장품 브랜드와 역직구 쇼핑몰을 만든 박인엽 심사역. 그는 지금 패스트벤처스에서 창업가들과 함께 웃고, 울고, 발버둥치는 1년차 심사역이 됐습니다. 회사의 대표로써 스타트업을 이끌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줄 알기에, 그는 '밤 10시'에도 대표님이 도움을 요청하면 달려가는 심사역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창업을 통해 깨달은 '대표'의 무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패스트벤처스에서 투자 심사역하고 있는 박인엽이라고 합니다. 저는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과를 전공했습니다. 학생 때부터 창업에 관심이 많아 지인들과 스타트업을 창업하느라, 경제학 자체에 대한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패스트벤처스 박인엽 심사역.
학생 때부터 창업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한 것 같은데요, 어떤 창업을 하셨나요?
A.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약 2년 간 맨즈 스킨케어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사업 도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터지는 바람에, 사정이 좋지 않아졌어요. 이후 사업 아이템을 바꾸게 되었고, 미국에 있는 한인 분들에게 리빙 제품을 타임딜로 저렴하게 판매하는 역직구 쇼핑 플랫폼 'Platform-K'를 만든 경험이 있습니다.
창업의 성과가 있었나요?
A. 사실 창업을 한다는게 매출이나 금전적 성과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팀원'이라는 '사람'을 얻은 것이 가장 큰 성과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실 창업 활동을 그만두고 심사역으로 일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면서 끈끈한 관계를 유지 중이거든요.
창업 시절 가장 힘들었던 적은 언제인가요?
A. 창업 초기에 가장 의지하고, 믿고 있었던 친구가 한명 있었어요. 그 친구와 대부분 일들을 상의하고 토론하면서 창업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친구가 생각하는 사업이나 아이템의 운영 방향과 제가 생각하는 방향이 서로 반대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사업을 운영하는데 있어 이도저도 선택하지 못하는 답보 상태에 이르게 됐죠.
당시 저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배보다, 멈춰있는 배가 가장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던것 같아요. 결국에 그 친구를 팀에서 내보냈던 경험이 있는데, 그날이 제가 창업 생활하는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슬펐던 날이었던 것 같아요.
사업을 잘 운영하다가, 심사역으로 오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A. 사업이 결코 쉽지가 않더라고요. 결과론적 측면에서 봤을 때, 제 사업은 잘 되지 않았어요. 제가 대표를 맡았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내가 이 사업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라는 일종의 좌절감과 "나의 역량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과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실력을 성장시키고,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해본 결과, 그 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심사역'이라는 직업이 의미있고 재미있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VC 업을 하다보면 좋은 팀과 사람들, 훌륭하신 대표님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런 자리를 통해서 많이 배우고, 나 역시 많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요.
'공부'와 '공감'의 중요성
현재 패스트벤처스에서 어떤 일을 주로 하시나요?
A. 투자팀 소속으로 훌륭한 초기 기업을 발굴하여 투자하고, 대표님들과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필요한 부분을 지원해주는 서포터 겸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커머스 관련 창업을 했었지만 초기 팀이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나오다보니, 바이오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의 아이템을 공부하고 있고요. 현재까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팀닷츠'에 투자한 경험이 있습니다.
심사역으로써 투자할 때 가장 많이 보는 조건이 무엇인가요?
A. 저희는 아무래도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하우스다보니 아예 아이템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고, 아이템이 있더라도 수면 위로 드러 낼만한 지표나, 수치 같은 것들이 거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창업가가 아이템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잘 만들어나가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주로 대표님이 가지신 생각이나 계획들, 그리고 지금까지 해오셨던 과정들에 대해서 많이 고민해보고, 미래를 상상해 보기도 하는 편이에요.
심사역의 하루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A. 저희는 초기 기업에 투자를 하잖아요. 많은 초기 스타트업 대표님들을 만나뵙고, 발굴한 딜 가운데서도 내부적으로 "이 팀은 너무 좋은 것 같다, 내가 꼭 투자하고 싶다" 하는 팀이 있으면 일주일에 한번씩 저희 팀 내부에 공유하는 자리가 있어요. 내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한번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나오면, 대표님들을 모시고 투자 발표를 하는 자리 'IR'가 있어요. IR에서는 그 팀의 아이디어나 서비스, 포부 등에 대해서 들어보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심사역이라는 직업이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데, MBTI가 어떻게 되나요?
A. MBTI는 'ENTP'입니다. 저는 'E'라는 외향적인 성격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실제 심사역이 'E' 성향을 가져야 잘할 수 있는 업이라고 생각하나요?
A. 아니요.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저희 패스트벤처스 박지웅 대표님은 극 'I' 성향이신데, 그렇다고 심사역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냐, 물으시면 그건 전혀 아닌 것 같거든요. 제가 생각했을 때 박 대표님은 가장 좋은 심사역이라고 말할 정도로 훌륭하신 분이에요. 그런 측면에서 외향이나 내향 같은 성향 자체가 이 업을 할 수 있느냐의 판단 기준은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심사역의 중요한 자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두번째는 창업자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창업을 해봤지만 커머스라는 특정된 섹터(sector)만 알고있었고, 그 외에는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했었거든요. 만약 계속 공부하지 않는다면, 다른 분야에서 창업하신 대표님을 만났을 때 얘기가 잘 통하지 않게 되죠. 실제로 초반에는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보면 미팅이나 딜 소싱 전체 프로세스 자체가 나이브(naive)해지거나, 비효율적이게 되죠. 그래서 항상 많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창업'이라는 활동 자체가 굉장히 외롭고 힘든 과정이잖아요. 창업자 분들의 상황이나 어려움에 공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팩트만 놓고 보면 '투자'라는게 투자사가 스타트업에게 돈을 대주고, 그 대가로 지분을 받는 어떤 경제 활동의 하나지만, 그것만으로는 투자를 받는 이유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요. 창업자의 입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치(value)'를 더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면, '공감'이라는 키워드 역시 하나의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인엽 패스트벤처스 심사역.
'10pm 심사역' = 박인엽
최근 첫 투자 성공했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과 심경이 어땠나요?
A. 입사 후 처음 받은 미션이 2주 동안 100개 팀을 만나는 것이였어요. 하루에 한 8~9개 팀을 빡세게(?) 만나는 생활을 했죠.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화상으로 팀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어느날, '팀닷츠'라는 스타트업을 화상으로 만났는데 "또 만나보고 싶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1시간 동안 창업하게 된 스토리와 사업 아이템을 들었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느낌이었죠. 그래서 대표님께 밤 10시에 미팅 끝나고 직접 사무실로 찾아 가겠다고 했는데, 대표님께서 흔쾌히 오시라고 하시는 거에요. 팀닷츠는 제가 투자하고 싶다고 대표님을 쫓아 다닌 케이스였습니다.
부담스러워하시진 않으셨나요?
A. 제가 창업했을 때 심사역이 나에게 이런 열정을 보여준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선배 심사역 중 한 분이 해주신 말 중에 "너라면 워라벨 따지는 심사역에게 투자받고 싶겠니?"라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저도 이렇게 노력하고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분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나에게 패스트벤처스란?
A. 제가 창업했을 당시에는 심사역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박지웅 대표님 페이스북에 올라온 심사역 채용 공고를 보게 됐는데, 'VC 역시 혁신을 통해 유니콘이 될 수 있다'는 말이 꽂혔어요. 실제로 패스트벤처스 조직의 일환이 되고, 팀원들을 계속 만나면서 그 확신이 계속해서 강해졌던 것 같아요.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내가 거기에 하나의 가치를 더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너무 행복한 과정이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패스트벤처스는 저한테는 우물 밖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 곳인 것 같습니다. 창업했을 때 일도 사실 바쁘고, 이것저것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보니 저희 팀과 일, 그 외 다른 것들은 생각해보지 못했었는데 심사역을 하며 발로 뛰어보니 세상에는 이렇게 좋은 팀, 훌륭한 창업자들이 많구나, 몸소 느끼게 해준 고마운 곳이에요.
박지웅 대표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 하셔도 좋습니다.
A. 제가 박 대표님께 받은 첫 인상은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있을 수 있구나"였어요. Q&A 세션에서 제게 30개 정도 질문을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제가 나름 고민해서 가져갔던 질문들을 마치 함수처럼 명쾌하고 논리적이게 대답해 주시더라고요. 거기서 "이 사람은 내가 했던 그 고민들에 대해서 평소에도 되게 많이 고민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 정립이 잘되어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나는 창업했을 때 우리 팀원들에게 이렇게 믿음을 주는 대표였을까, 반성도 했고요. 항상 많은 자극을 받고 있고, 정말 배울 점이 많은 대표님이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예비 창업가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
A. 창업이라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결과로만 평가받게 되는 것 같아요. 저희 업 자체도 지표나 결과물로 그 팀이 성공했냐, 실패했냐를 따지는 업이다 보니, 아직 그런 행태들이 사실 좀 많은 것 같은데요. 제가 만약 창업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만큼의 크기와 기울기만큼 성장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요. 많이 힘들고 외로우시겠지만, 그 '과정' 자체에 집중하다보면 개인과 팀원 전체가 많이 성장할 것 같고, 그렇게 하다보면 '결과'도 좋은 쪽으로 분명 변화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저희 패스트벤처스는 '창업자 프렌들리(Founder-friendly)'하게 접근하는 하우스입니다. 항상 창업가 분들이 어떤 것들이 필요하실지 고민하고, 어떤 것들을 해드리면 창업가분들이 창업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여러가지 product, 내부적인 system, 제도들을 갖춰나가고 있죠. 창업을 계획하고 계시거나 이미 하고 계신 예비/초기 창업가분들이 앞으로도 저희와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