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로 일하다보면 디폴트로 거절을 가장 많이 하게 됩니다. 투자를 유치하고자 하는 창업팀은 많지만, 그 중에 또 나름의 생각으로 아주 극소수만 선별해서 투자를 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만나는 대다수의 창업팀에게 ‘거절’의사를 표시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셈입니다.
이게 상대방인 창업팀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쉽지 않은 경험입니다.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투자유치의 길을 나섰는데, 만나는 대다수의 VC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거절이니까요. 사실 거절당하는 입장에서 기분이 유쾌할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VC는 창업팀들에게 비난받기 상대적으로 쉬운 포지션에 있습니다. 창업팀에 비해 숫자도 적고, 나름의 이유를 들건 들지 않건 결국 거절을 많이 하게 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VC의 큰 고객은 바로 창업자(팀)입니다. 이들로부터 우호적인 평판을 쌓는 것이 VC의 최종 목적이 될 순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비우호적인 평판을 줄여나가는 것은 VC 입장에서 꽤 필요한 일이 됩니다. 다만, 창업팀 입장에서 VC와의 경험의 상당수는 VC에서 일하는 특정 누군가와의 미팅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VC 입장에서 이 창업팀과의 경험을 관리해나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지점입니다. VC 소속의 누군가와 1:1로 미팅을 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보통이기에, 그 미팅에서 이뤄진 각자의 느낌과 생각은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습니다. 때론 내용 그 자체보다도, 태도가 이슈가 되어 VC와의 미팅이 불쾌한 경험으로 남고, 그게 또 누군가에게 구전이 되어, 훌륭한 창업팀이 우리와의 만남 자체를 거부하거나, 또 투자를 받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첫 단계로 창업팀과의 교류에 있어서, 10계명을 내부적으로 정하고, 이를 꼭 지키기로 하고 있습니다. (내부 10계명이기 때문에 높임말이 아닙니다)
피곤하면 미팅을 미뤄라
첫 미팅은 부르지 말고 찾아가라
말하지 말고 들어라
말해야 하면 질문해라
즉석에서 평가하거나 피드백하지 마라
지적호기심 해소하지 마라
귀찮다고 이메일 씹지 마라
미팅 전에 자료는 미리 읽고 가라
본인 인맥 자랑하지 마라
창업자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남이 이뤄지기 때문에, 모든 상황, 모든 사람들에게 이 원칙들을 체화한 상태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VC 소속의 임직원들의 하루는 대다수가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가득차기 마련이고,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에너지를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성원들의 모든 미팅에서의 원칙 준수라는 것은 권장할 만한 사항이되, 제어 가능하진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이뤄지던 차에,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통해 VC인 우리가 창업팀이 고객이라면 그 고객들로부터 만족도 조사 (일종의 NPS 조사)를 받아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모든 미팅에서 이뤄지긴 어렵지만, 적어도 창업팀과 패스트벤처스팀 전체가 회사 vs. 회사로 만나는 지점인, IR 미팅에서 그러한 장치를 두면 어떨까가 아이디어의 시작이었습니다.
연초에 아이디어의 생성에서부터 이런저런 논의를 거쳐, 2월부터 진행되는 패스트벤처스의 IR 에서는, IR이 끝나면 비 투자팀 구성원 중 1명으로부터 IR에 참여해준 창업팀에게 만족도 조사를 하는 Google Survey가 나가게 됩니다. 아주 심층적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IR 및 Q&A에서의 경험에 대해 정량적으로도 점수를 받아보고, 정성적으로도 기대했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받고 있습니다. (만족도 조사 포맷은 아직 너무 초기이고 설익어서 공유가 어렵네요 ^^;)
물론, 창업팀 입장에서는 아직 투자 프로세스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과감하게, 있는 그대로, 단점을 지적하기 어렵겠다는 의견도 내부에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약간의 긍정 도색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운 점들에 대해 표현할 수 있고, 또 저희도 기꺼이 그러한 점을 받아들이고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주실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계속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내부 구성원들에게도 이러한 장치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창업팀과 벤처스팀과의 사실상 정식 첫 만남인 IR의 경험에서 충분히 주의하고 창업팀이 할애해준 시간을 생산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패스트벤처스팀 내부적으로는 이를 IR Experience라고 부릅니다. 사실 저희는 무조건적으로 따뜻한 응원을 하는 것만이 창업팀에게 저희를 좋은 이미지로 포지셔닝하게 할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따뜻함이 필요할 땐 위로를, 차가운 지적이 필요할 땐 냉철한 조언을 주는, 냉온탕을 오가는 것이 투자자가 창업팀에게 제공해야 하는 온도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IR Experience를 향상시키기 위해 만족도 조사 등을 도입해 노력하는 것은 창업팀과 패스트벤처스를 동등한 입장에서 (우리 스스로가) 바라보며, 이들을 고객으로 여기며, 또 그에 따른 기본과 예의를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추후 패스트벤처스의 IR에 invite 되시는 모든 창업팀 분들은 아마 만족도 조사 이메일을 IR 이후 24시간 이내에 받게 되실 건데요. 문제점과 적나라한 비판을 적으시면 혹여나 투자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거라 생각하실 수 있는 단 1%의 걱정이라도 모두 접어두시고 (오히려 적나라하게 비판을 적어주시면 저희가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저희가 더 나은 투자자가 될 수 있도록 신랄하게 느끼신 바를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계속 발전해나가겠습니다.